깊어 가는 가을 다큐영화 위로공단 용인공동체 상영회에 초대합니다.
일시 : 2015년 11월 3일 화요일 저녁7시 30분
장소 : 포은아트홀 이벤트홀
관람비 : 5천원
[ KEYWORD로 보는 위로공단 ]
은 역사 속 신념을 잃지 않고 일했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비추는 1970년대부터 2015년에 이르는 세월 속엔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처지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게 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눈물이 배어있다. 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그 역사의 현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1)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전체 1,300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인 사업장으로서 이미 1946년에 노조가 결성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다가, 72년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를 선출한 이래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노조활동을 진행해왔다. 76년 7월 23일 노조지부장 이영숙이 경찰에 연행된 틈을 타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고두영이 회사 측 방침에 순응하는 대의원 24명만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고 자신을 지부장으로 선출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수백 명의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 농성에 돌입, 회사 측의 처사에 항의했다. 농성조합원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자, 70여 명의 조합원들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저항했으나 경찰은 곤봉과 주먹을 휘두르며 이들을 무차별 연행, 40여 명이 기절하고 14명이 부상하는 등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한편 ‘동일방직분규 수습대책회의’의 합의사항에 따라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된 집행부는 78년 2월 21일을 대의원 선거일로 공고하고 준비 중이었는데, 선거 당일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4명이 투표장을 기습, 부근에 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끼얹으며 노조 사무실을 습격, 조합원들을 집단 폭행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방조하고,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 이총각 지부장 및 총무부장 등 4명을 제명했으며, 회사 측은 124명의 조합원을 무더기 해고시켰다.
2) YH무역 농성사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 있던 YH무역 노동자 200여 명이 회사 측의 부당한 폐업 공고에 반대해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운영의 정상화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주장하며 벌인 농성 투쟁 사건을 말한다. YH무역은 1966년 자본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설립한 작은 가발 제조업체였으나,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 종업원이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창립자인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으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4월 폐업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시작했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고, 취재하던 기자 및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원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노조 집행위원장인 김경숙이 사망했고, 경찰을 제지하던 172명의 여성 근로자와 신민당 당원 26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3) 구로동맹파업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김준용 위원장의 구속으로 시작, 노조 탄압에 연대투쟁으로 맞선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으로,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자 이후 대한민국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5년 6월 22일 구로 지역의 중심 노조였던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에 대한 정부의 구속조치가 파업의 발단이 되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은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또한,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학생•재야단체가 가리봉 5거리에서 가두사위를 벌였고, 농성해산 당일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지붕을 넘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조들은 모두 강제해산 당했고, 마지막까지 농성을 벌이던 대우어패럴마저 농성장 벽을 뚫고 진입한 회사 측의 보복조치로 해산, 천여 명에 달하는 노조간부와 핵심조합원들이 해고되는 등 구로동맹파업은 많은 피해를 내고 끝났다.
4) 기륭전자 사태
기륭전자 사태는 2005년 7월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뒤 이어진 비정규직 해고사태로부터 시작됐다. 2005년 기륭전자에 노동조합이 설립됐을 때, 생산직 노동자 300여 명 중 정규직은 단 15명 뿐이었다. 특히 파견직 노동자들은 기본급이 법정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1,840원으로, 잔업 100시간을 일해야 100만원의 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최악의 수준이었다. 노조는 이에 대응해 점거농성과 파업을 벌였고 그 해 10월 기륭전자는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으나, 오히려 생산라인을 도급으로 전환하고 80여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에 노조가 삭발, 단식, 고공농성등을 벌이며 정규직화 투쟁을 지속하면서1,900여일동안 수십 차례의 교섭과 결렬을 반복해 왔다.
5) 캄보디아 유혈사태
캄보디아 의류 노동자들은 월 9만원이 되지 않는 최저 임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최저임금을 월 15만원 이상으로 인상해줄 것을 2013년 내내 요구해왔다. 캄보디아 정부가 주도한 노동자문위원회의 실태조사반도 월 15만원 이상으로 임금인상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의류산업 업체를 의식한 캄보디아 정부가 월 11만원 수준으로만 인상하겠다고 발표하자, 캄보디아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감행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자 한국, 일본, 중국 업체들은 자국 대사관을 통해 캄보디아 정부에 사태 해결(강경진압)을 촉구하였다. 특히 한국 대사관은 캄보디아 당국에 서한을 보내 한국 업체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2014년 1월 2일, 노동자들이 한국 의류업체 약진통상 앞을 행진할 때 캄보디아 정예 특수부대가 노동자들을 습격했다. 무차별 구타와 폭행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5명의 승려를 포함한 10명이 연행되었다. 폭력 진압이 자행된 다음 날인 1월 3일, 캄보디아 헌병대 및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실탄을 발사했고, 이 총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틀에 걸친 진압으로 체포된 23명의 노동자와 승려,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어디에 구금되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시 : 2015년 11월 3일 화요일 저녁7시 30분
장소 : 포은아트홀 이벤트홀
관람비 : 5천원
[ KEYWORD로 보는 위로공단 ]
은 역사 속 신념을 잃지 않고 일했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비추는 1970년대부터 2015년에 이르는 세월 속엔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처지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게 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눈물이 배어있다. 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그 역사의 현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1)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전체 1,300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인 사업장으로서 이미 1946년에 노조가 결성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다가, 72년 한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 주길자를 선출한 이래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노조활동을 진행해왔다. 76년 7월 23일 노조지부장 이영숙이 경찰에 연행된 틈을 타 회사 측의 사주를 받은 고두영이 회사 측 방침에 순응하는 대의원 24명만을 모아 대의원대회를 열고 자신을 지부장으로 선출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수백 명의 여성 조합원들은 즉각 농성에 돌입, 회사 측의 처사에 항의했다. 농성조합원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자, 70여 명의 조합원들은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저항했으나 경찰은 곤봉과 주먹을 휘두르며 이들을 무차별 연행, 40여 명이 기절하고 14명이 부상하는 등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한편 ‘동일방직분규 수습대책회의’의 합의사항에 따라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된 집행부는 78년 2월 21일을 대의원 선거일로 공고하고 준비 중이었는데, 선거 당일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4명이 투표장을 기습, 부근에 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끼얹으며 노조 사무실을 습격, 조합원들을 집단 폭행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방조하고, 전국섬유노조는 3월 6일 동일방직노조를 사고지부로 처리, 이총각 지부장 및 총무부장 등 4명을 제명했으며, 회사 측은 124명의 조합원을 무더기 해고시켰다.
2) YH무역 농성사건
1979년 8월 9일부터 11일까지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 있던 YH무역 노동자 200여 명이 회사 측의 부당한 폐업 공고에 반대해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회사 운영의 정상화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주장하며 벌인 농성 투쟁 사건을 말한다. YH무역은 1966년 자본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설립한 작은 가발 제조업체였으나,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 종업원이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창립자인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고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으나,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의 후퇴와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4월 폐업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폐업 철회와 임금 청산, 고용 승계를 위한 농성을 시작했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1,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난입해 폭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했고, 취재하던 기자 및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당원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노조 집행위원장인 김경숙이 사망했고, 경찰을 제지하던 172명의 여성 근로자와 신민당 당원 26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3) 구로동맹파업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김준용 위원장의 구속으로 시작, 노조 탄압에 연대투쟁으로 맞선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으로,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자 이후 대한민국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5년 6월 22일 구로 지역의 중심 노조였던 대우어패럴 김준용 위원장에 대한 정부의 구속조치가 파업의 발단이 되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것을 신호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가 즉각 파업에 돌입했고, 25일에는 남성전기•롬코리아가, 28일에는 부흥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가담함으로써 참여 노조 숫자는 총 10개, 노조원은 약 2천 5백여 명에 달했다. 또한,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자•학생•재야단체가 가리봉 5거리에서 가두사위를 벌였고, 농성해산 당일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지붕을 넘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합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조들은 모두 강제해산 당했고, 마지막까지 농성을 벌이던 대우어패럴마저 농성장 벽을 뚫고 진입한 회사 측의 보복조치로 해산, 천여 명에 달하는 노조간부와 핵심조합원들이 해고되는 등 구로동맹파업은 많은 피해를 내고 끝났다.
4) 기륭전자 사태
기륭전자 사태는 2005년 7월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한 뒤 이어진 비정규직 해고사태로부터 시작됐다. 2005년 기륭전자에 노동조합이 설립됐을 때, 생산직 노동자 300여 명 중 정규직은 단 15명 뿐이었다. 특히 파견직 노동자들은 기본급이 법정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1,840원으로, 잔업 100시간을 일해야 100만원의 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최악의 수준이었다. 노조는 이에 대응해 점거농성과 파업을 벌였고 그 해 10월 기륭전자는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으나, 오히려 생산라인을 도급으로 전환하고 80여 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에 노조가 삭발, 단식, 고공농성등을 벌이며 정규직화 투쟁을 지속하면서1,900여일동안 수십 차례의 교섭과 결렬을 반복해 왔다.
5) 캄보디아 유혈사태
캄보디아 의류 노동자들은 월 9만원이 되지 않는 최저 임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최저임금을 월 15만원 이상으로 인상해줄 것을 2013년 내내 요구해왔다. 캄보디아 정부가 주도한 노동자문위원회의 실태조사반도 월 15만원 이상으로 임금인상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 수출의 80%를 차지하는 의류산업 업체를 의식한 캄보디아 정부가 월 11만원 수준으로만 인상하겠다고 발표하자, 캄보디아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감행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자 한국, 일본, 중국 업체들은 자국 대사관을 통해 캄보디아 정부에 사태 해결(강경진압)을 촉구하였다. 특히 한국 대사관은 캄보디아 당국에 서한을 보내 한국 업체에 대한 보호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2014년 1월 2일, 노동자들이 한국 의류업체 약진통상 앞을 행진할 때 캄보디아 정예 특수부대가 노동자들을 습격했다. 무차별 구타와 폭행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5명의 승려를 포함한 10명이 연행되었다. 폭력 진압이 자행된 다음 날인 1월 3일, 캄보디아 헌병대 및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실탄을 발사했고, 이 총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틀에 걸친 진압으로 체포된 23명의 노동자와 승려, 활동가들은 지금까지 어디에 구금되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